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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다식

한일관계 중, 춘생문春生門 사건과 아관파천俄館播遷 까지

by KaNonx카논 2017.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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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중, 춘생문春生門 사건과 아관파천俄館播遷 까지

 

 

이 포스트에서는 우선 한일관계 중,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알아본 뒤

 

 

대동합방론을 제창하며 일진회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한일합방에 앞장선

 

흑룡회의 결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흑룡회.. 사실 중,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그리 졸았던 기억은 없는데

 

너무나도 생소한 그 이름...

 

 

흑룡회는,

 

1901년에 설립된 일본의 우익단체. 중국, 만주, 러시아에 걸쳐 흐르는 흑룡강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알려져있죠

 

 무려 영문명은 Black Dragon Society... 중 2병의 느낌이 어디선가....

 

위의 이미지가 바로 흑룡회의 문장인데요

 

우선 흑룡회가 나타난 시대의 배경부터 알아보고자 합니다.

 

나무위키 흑룡회 - https://namu.wiki/w/%ED%9D%91%EB%A3%A1%ED%9A%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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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민비 -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 고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고자 했던 춘생문(春生門)사건이 있었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존슨이 직접 공수한 통조림으로

 

 고종을 연명시킬 정도였습니다.

 


미국 공사관으로 도망칠 계획을 군부협판 이도철임최수가 세우고

 

새 왕비로 간택된 안동김씨의 입궁 시기 이용해 빠져나가려 했지요.

 

 

11월 28일, 시종 임최수와 친위대 800명의 병력을 춘생문(春生門)을 통해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친위대 장교 안경수이진호가 변심하여 친일파 어윤중에게 밀고하여 거사는 실패하게 되지요.

 

 


이로 인하여 일본의 압박으로 미국 선교사들의 정치 관여가 부자유스럽게 되었지만,

 

 결국 이 사건이 일어난지 3개월여 후 결국 고종은 왕세자(이척)와 함께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도움을 청해 러시아 수병들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호위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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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은 정동파(貞洞派) 친러세력의 공모로인해 이루어 진 것인데요,

 

여기서 정동파(貞洞派)란?

 

 

외국의 공관들이 위치한 서울의 정동을 중심으로 활동한 세력으로,

 

원래는 친미, 친러, 친영 경향의 세력이었으나,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등으로

 

나중에는 친미적 경향이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친미파(親美派), 영어파(英語波)라고도 하였다네요.

 

 

정동파의 주요 인사는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윤치호(尹致昊)·서재필(徐載弼) 등이 있었으며


이 후 독립신문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동파가 주도한 아관파천의 배경에는

 

황후시해사건(1895.10.8.)과 단발령(1895.12.30.) 실시 등 급진개혁정책 전개로 인한 의병봉기와

 

민씨 척족세력과 친미‧친러 세력(정동파)의 정권만회 움직임 등이 있었지요

 

 

 

아관파천의 결과, 친일파 내각이 해산되고

 

개화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참형당하는 등

 

친일파가 대거 숙청 혹은 망명, 유배당합니다.

 

 

그 후 친미, 친러파의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어 내각을 구성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갑오·을미 개혁사업을 중단하고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되자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었지만,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했습니다.

 

더욱 한반도를 둘러싼 러, 일의 대립이 첨예화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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